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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현대전쟁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1 진주만 공습

by BrianKang 2020.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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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운이 감도는 태평양 전선

 

1868년 일본에서는 막부를 무너뜨리고, 천황을 중심으로 입헌군주제로 탈바꿈하게 된 '메이지 유신'이 벌어집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 운동이 진행되었고, 서구 열강으로부터 신식 무기와 전술을 받아들여 군대의 근대화도 시작됩니다. 이후 1895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에서 연단 승리로 일본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게 됩니다. 

 

1914년에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명목상 '연합군'에 가담하게 됩니다. 그 결과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 승전국이 된 일본은 패전국 독일의 세력권이었던 중국 산둥반도와 캐롤라인 제도, 마샬 군도, 괌을 제외한 마리아나 군도 등의 점유권을 주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의 거센 반대로 일본의 주장은 반려되고 맙니다.

 

1929년 미국의 <경제 대공황>이 발생하고, 일본 또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일본은 이 상황을 극복하고자 '극우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 내부를 결속시키고, '식민지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과 자원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1931년 9월 중국 봉천 일대에서 일본 소유 만주 철도를 스스로 파괴시키고, 이를 중국의 소행으로 조작하는 <봉천 사건>을 벌입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만주철도 보호 명분으로 만주지역을 침공하는 <만주사변>을 벌이게 됩니다.(당시 만주지역에는 전쟁 필수자원인 철과 석탄이 풍부하였다고 합니다.)

 

1932년 3월에 일본군은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수립하게 되고, 만주지역을 장악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계 열강들은 일본의 행동에 대해 비난하고, 만주를 중국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고,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게 됩니다.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국을 침공하는 <중일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일본은 만주와 상하이 방면으로 군대를 투입하여 '베이징', '톈진', '상하이', '난징'까지 장악하게 됩니다. 이때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약 30만명의 무고한 중국 시민들을 잔인하게 살육하고 약탈하였던 <징 대학살>을 벌이게 됩니다.

 

미국과 유럽은 일본을 제재하고자 하였으나,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저지됩니다. 이후 나치 독일은 전격전을 통한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허를 찌르는 공격으로 1940년 5월 10일에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점령하게 됩니다.

 

1940년 9월에 일본은 독일과 이탈리아와의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1941년 4월에 소련과 5년간의 불가침조약을 맺게 됩니다. 1941년 7월에 프랑스령의 인도차이나 지역을 침공하게 됩니다.(이 지역은 전쟁 필수자원인 고무와 목재가 풍부한 지역이었습니다.)

 

1941년 7월 이후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를 포함한 모든 수출을 중단시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지금까지 점령한 모든 식민지를 포기해야만 경제 제재를 해제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당시 일본은 미국에 석유를 80%를 의존하고 있었기에 이 경제제재로 인해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또한 미국은 영국과 중국, 네덜란드를 필두로 'ABCD선(America-British-China-Dutch)'을 통해 일본을 정치 및 경제, 군사적으로 봉쇄하고자 하였습니다.

 

2. 궁지에 몰린 일본, 전쟁을 준비하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고, 이에 따라 일본은 미국과의 전쟁을 총 3단계로 계획하게 됩니다.

1단계는 기습작전을 통해 '미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시키고, 아시아에 고립된 연합군 잔류병력을 제거하고, 아시아의 남방 자원지대를 점령하는 것이었습니다.

2단계는 강력한 외곽 방어선(쿠릴 열도~웨이크 섬~마샬 군도~길버트 군도~비스마르크 제도~북부 뉴기니 섬~티모르 섬~자바 섬~수마트라 섬~말라야~버마)을 구축하고 요새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3단계는 구축된 외곽 방어선으로 공격해오는 연합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지구전을 감행하여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점령지를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주만'에 주둔 중인 '미 태평양 함대'를 기습을 통해 무력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을 위해 약 3,500마일(약 5,600km)에 달하는 거리를 미국에 발각되지 않고, 진주만을 기습적으로 공습해야 하는 어려운 작전이었습니다.

일본 해군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출처 : 위키백과

이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주도면밀한 작전계획이 필요했고, 이 작전은 일본 해군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주도 하에 준비하게 됩니다. '야마모토' 제독의 작전은 진주만 인근까지 함대를 은밀히 기동시키고, 함공모함에 탑재한 항공기에 의해 진주만 해군기지를 공습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해군 나구모 주이치 중장, 출처 : 위키백과

먼저 야마모토 제독은 '나구모 중장'이 지휘하는 '제1항공함대'로 공습 부대로 지정하고, 약 420대의 함재기를 탑재한 함공모함 6척과 전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9척, 잠수함 3척, 유조선 8척으로 '제1항공함대'를 편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주만에 일본 해군 장교 출신의 간첩을 침투시켜 8개월 동안 첩보를 수집하였고, 이 첩보를 통해서 진주만과 미 태평양 함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진주만 공습에 대한 세부적인 작전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일본군의 공격 목표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야마모토' 제독은 인도차이나 해역에서 대규모 기동훈련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는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공격할 것으로 연합군에게 착각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일본 해군 '제1항공함대'는 '쿠릴열도'에서 출항하여 발각될 위험이 다소 적었던 북태평양 항로로 진주만을 향해 은밀하게 기동하게 됩니다. 

 

3. 미국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고, 영국에게 막대한 무기와 전쟁물자를 보급하고 있었습니다. 나치 독일의 전 유럽의 점령을 영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을 막을 세력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 태평양 함대'를 '진주만'에 주둔시키고, '허스밴드 킴멜' 제독을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당시 '미 태평양 함대'의 전력은 강했습니다. 당시 '미 태평양 함대'는 전함 9척과 항공모함 3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8척, 구축함 54척, 잠수함 22척을 보유하고 있었고, 항공기는 육ㆍ해군을 합쳐서 약 450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와이 제도의 방어를 위해 주둔 중이던 약 59,000명 미 육군의 지상군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보면 미국 또한 일본과의 전쟁을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이 진주만을 직접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진주만'은 육지로부터 약 5,600km나 떨어져 있었고, 주만의 수심이 1~2m 정도로 상당히 얕았고좁은 입구로 인해 공격이 불가능한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또한 '진주만'에 비행장과 항만 시설, 수리 시설, 방어 시설, 연료 저장고가 잘 구비되어 있었고, 레이더 또한 도입되어 적의 공격을 사전에 탐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은 진주만이 공격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미 정보부가 일본이 전쟁을 전면적으로 준비한다는 암호통신을 감청하게 되지만 일본의 공격 예상지역에 '진주만'을 포함시키지 않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미 정보부의 오판으로 진주만이 공격 대상에서 제외되자 '킴멜' 제독은 '미 태평양 함대'를 일본의 다른 공격 예상지역으로 파견하기 위해 훈련만 강화하고, '진주만'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킴멜' 제독과 휘하 참모들은 '진주만'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일본과 전쟁을 시작한다면 일본인들의 폭동이나 테러활동을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주만'의 대부분의 병력을 항만과 비행장 방호에 투입시키고, 정작 전투준비를 소홀하게 됩니다.

 

운명의 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이 운명의 날은 훗날 일본과 미국의 운명 또한 달라지게 됩니다.

 

4. 운명의 날, 진주만 공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주말 아침을 한가로이 보내고 있었던 '미 태평양 함대'의 대원들. 어떤 사람은 여유롭게 아침식사를, 어떤 사람은 늦잠을 자고 있을 평화로웠던 일요일 아침. 하지만 평화로웠던 '진주만'의 아침은 일본군의 기습적인 공습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12월 7일 06:00경 일본 해군 '제1함공함대'는 오아후 섬 북쪽 200마일 해상에 도착하게 됩니다. 일본 해군 '제1함공함대'의 '나구모' 중장은 제1파와 제2파, 2차에 걸친 공격을 하기로 계획하고 있었고, 07:50경 '제1파 공격'을 위해 함재기들을 출격시킵니다.

 

이때 '미 태평양 함대'의 레이더에 수많은 항공기가 식별되었고, 이 사실을 곧바로 보고합니다. 하지만 상층부에서는 그날 아군의 'B-17 폭격 편대'가 오게 되는 일정으로 오인하게 되고, 여전히 경계태세는 강화되지 않게 됩니다.

 

'진주만' 상공에 도착한 '제1파 공격대'는 '진주만'에 정박 중인 전함들과 비행장, 해군 수리시설을 폭격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08:25경 공습을 마친 일본 해군의 '제1파 공격대'가 철수하고, 곧이어 08:50경 일본 해군의 '제2파 공격대'가 다시 공습하게 됩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 출처 : 게티이미지 코리아(네이버 지식백과)

2차례에 걸친 일본 해군의 기습 공습으로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했던 '미 태평양함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애리조나 호'를 포함한 8척의 전함 중 5척이 격침되었고 200여 대의 항공기의 파괴되고, 민간인을 포함한 2,000명 이상이 사망하는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특히 미국의 전함 '애리조나 호'는 탄약고에 직격탄을 맞아 폭발하여 '애리조나 호'에 타고 있던 약 1,000명의 병사가 순식간에 사망하는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습니다.

 

뜻밖에도 진주만 공습 간 어뢰 공격으로 인한 피해가 많았습니다. 당시 진주만의 얕은 수심으로 어뢰 공격이 어려울 것을 알고 있었던 일본 해군은 얕은 수심에도 투하할 수 있는 새로운 어뢰 장치를 개발하게 됩니다. 이 어뢰를 이용하여 일본 해군은 '미 태평양함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제1파와 제2파 공격을 마친 일본 해군은 계획됐던 제2차 공격을 돌연 취소하게 됩니다. 일본 '나구모' 중장의 판단으로 기습 효과는 이미 달성했고, '미 태평양 함대'에게 충분히 피해를 주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판단은 '나구모' 중장의 오판이었습니다.

 

당시 미 항공모함 4척은 훈련으로 인해 공습을 피할 수 있었고, 일본 해군의 제1파와 제2파 공격 때 '미 태평양 함대'의 수리시설, 유류고를 제거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사실 '미 태평양함대'의 수리시설과 유류고는 제2차 공격의 공격목표였고, 작전 취소로 인해 피해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피해를 입지 않은 '미 태평양함대'의 항공모함과 수리시설, 유류고는 '미 태평양 함대'의 급속한 전력 복구를 허용하게 되고,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바꾸는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5. 치욕의 날, 잠자고 있던 거인이 깨어난다!

 

<진주만 공습>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남부자원지대인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곧바로 점령하게 됩니다. 이제 일본군은 아시아에 고립된 연합군의 잔류병력 제거와 외곽 방어선 구축을 목표로 움직이게 됩니다. 

 

반면 미국은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물리적ㆍ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에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날을 '치욕의 날'로 선정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것을 선포하게 됩니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국민들은 크게 분노하였고, "Remember Pearl harbor!(진주만을 기억하자!)"라는 구호로 단결하게 됩니다.

 

이후 미국은 수많은 자원입대 "붐"이 일었고 '전시체제의 공고화'로 본격적으로 전시체제로 전환하고,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게 됩니다. 진주만 공습으로 잠자고 있던 거인이 깨어나게 된 것입니다.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W.니미츠, 출처:위키백과

또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체스터. W. 니미츠' 제독을 임명하게 됩니다.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니미츠' 제독은 '미 태평양 함대'의 신속한 전력 복구와 태평양 전선의 주도권을 탈환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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